루테티아Lutetia에서 천만 대도시 파리로의 여정

루테티아Lutetia, 기원전 50년, 알베르 위데르조Albert Uderzo 작

루테티아Lutetia, 기원전 50년, 알베르 위데르조Albert Uderzo 작

프랑스는 정치적 불안과 전쟁으로 일시 정부 소재지로 사용한 곳을 포함하여 총 9개 수도가 있었고 수도 위치는 총 13번이나 바뀌었다.

프랑스 심장부인 파리는 4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사실상 권력과 문화의 상징적인 중심지였음에도 이상하게도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수도로 지정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기원전 3세기에 켈트족인 파리시Parisii(이 도시의 이름이 된 인물)가 정착한 이곳은 주요 무역 중심지였다.

로마인들은 파리를 루테티아Lutetia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센 강을 건너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오늘날 독일과 스페인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였음에도 루테티아는 처음에는 속주 7개 도시 중 순위가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파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유명해졌을까?

지방 도시에서 수도로

서기 2세기 루테티아. 이미 섬에서 빠져나왔음을 본다.

파리는 군사적 이점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장점 덕분에 인정을 받고 결국 로마 갈리아Roman Gaul의 수도가 되었다.

센 강 한가운데 있는 시테 섬Île de la Cité에 위치한 파리는 강력한 방어 거점을 제공하여 적군이 점령하기 어려웠다.

강의 자연 장벽과 도시로 접근하기 위한 길고 노출된 다리의 필요성은 로마 제국 쇠퇴기에 파리를 군사적 거점으로 만들었다. .

파리는 방어 시설 외에도 발전에 기여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건축용 고품질 석회암, 기와용 점토, 석고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흙이 있었다.

또한 파리시 왕조 시대에는 몽마르트Montmarte, 메닐몽탕Ménilmontant, 벨빌Belleville, 그리고 생트 주느비에브 산Montagne Sainte-Geneviève 언덕에 목재가 풍부했다.

로마 시대에는 목재가 솜 강변 숲에서 더 멀리까지 발견되었는데, 이 강은 하천 교역로로서 중요했으며 센 강과는 달리 얼거나 범람하거나 마르지 않았다.

프랑스의 수도는 쉽게 리옹, 또는 로마 갈리아어로 루그두눔Lugdunum으로 알려졌을 수도 있었다.

리옹은 북유럽과 지중해(그리고 로마 자체)를 연결하는 데 유리한 입지를 지녔으며, 론Rhône 강과 손Saône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무역과 운송이 매우 용이했다.

리옹은 세 갈리아Three Gauls의 행정 수도였기 때문에 도시의 영향력은 위치나 속성보다 더 컸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부분적으로는 클로비스 Clovis 왕이 이끄는 프랑크족의 정복으로 프랑크족은 북동쪽에서 진격했다.

508년 서고트족Visgoths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프랑크족이 마주친 첫 번째 주요 로마 전초 기지는 파리였다.

프랑크족 통치자들은 리옹의 방어적, 정치적 이점을 알아차렸고, 그 중요성은 거기서부터 커졌다.

클로비스는 영구적인 수도나 중앙 정부를 갖지 않았지만, 파리를 자신의 무덤으로 선택함으로써 도시에 상당한 상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의 손자들은 누가 도시를 통치할 것인지를 놓고 거의 다툼을 벌였지만, 결국 파리를 공동 소유지로 삼고 왕조의 핵심 상징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 도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888년 서프랑크 왕국 왕으로 대관된 프랑스의 외드Eudes의 통치 기간이었다.

이미 파리 백작Count of Paris이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카롤링거Carolingia 왕조 통치가 쇠퇴하면서 점차 서프랑크 왕국West Francia이 독립하여 등장했다.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파리는 프랑스 군주제의 중심지로서 더욱 공고해졌다.

필리프 오귀스트 1세 치하에서 루브르 박물관이 건립되고, 시테 궁전alais de la Cité에 왕실 기록 보관소가 설립되었으며, 왕실 행정이 중앙 집권화하면서 파리는 왕권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