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브라트의 보물Treasure of Kubrat, 고대 대불가리아
1912년 어느 여름날, 우크라이나 말라야 페레셰피나Malaya Pereshchepina 마을 양치기 소년들이 보르스클라Vorskla 강가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한 소년이 허리까지 모래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소년을 꺼내 보니 커다란 금 항아리gold vessel 속에 빠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금 20kg, 은 50kg에 달하는 귀중한 물건들을 건져 올렸다.
정교하게 만든 식기류, 다양한 장신구, 화려하게 장식된 무기들이었다.
키예프에서 경찰과 고고학자들이 도착하여 유물들을 수거했고, 러시아 최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발견은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첫 번째는 보물의 연대 측정 문제였다. 하지만 이는 비교적 쉽게 밝혀낼 수 있었다. 유물들 형태가 서기 6세기 특징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고유한 유행이 있었던 만큼, 연대 측정은 6세기 중반 비잔티움을 통치한 헤라클리우스Heraclius 황제의 동전을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하지만 그때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 보물들은 누구 소유였을까?
비잔틴, 페르시아, 훈족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 보물이 오랜 기간에 걸쳐 외국 군주들의 선물이나 전쟁 중 약탈, 또는 다른 민족으로부터 귀중한 물건을 사들여 모은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 보물이 우연히 묻힌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인물 무덤에서 나온 것이며, 그 인물이 가장 귀중하게 여긴 물건들이 함께 묻혔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이러한 보물은 당시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 거주하던 불가르족Bulgars 소유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이 보물은 아바르족Avars, 하자르족Khazars, 슬라브족Slavs 것이 아니라 불가르족 통치자 중 한 명의 소유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다음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강력한 통치자는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독일의 위대한 고고학자이자 인장학자인 베르너 자이프트Werner Seibt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무덤에서 발견된 반지가 대불가리아 통치자 쿠브라트(ΧΟΒΡΑΤΟΥ ΠΑΤΡΙΚΙΟΥ, “쿠브라트 귀족Kubrat the Patrician의 인장”)의 것이라고 해독했다.
당시 그의 영토는 드네프르 강, 돈 강, 드네스타르 강을 따라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으며, 이는 불가리아족 최초 국가 통일로 인정받는다.
쿠브라토스는 어린 시절을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황궁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살면서 비잔틴 문화와 생활 방식을 접하게 되었다. 7세기 비잔틴 역사가 요한 데 니키우John of Nikiu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프로젝트는 훈족의 족장이자 오르가나Organa의 조카인 쿠브라토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져 황궁에서 자랐다. 그와 헤라클리우스 황제 사이에는 깊은 애정과 평화가 있었고, 헤라클리우스가 죽은 후 그는 헤라클리우스가 자신에게 베푼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과 아내 마르티나에게 애정을 보였다. 생명을 주는 세례를 받은 후, 그는 성스러운 세례의 은총으로 모든 야만인과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가 헤라클리우스 자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이익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 사료는 쿠브라트가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며, 이는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불가리아 군주였음을 의미한다. 그의 개종은 서기 619년경으로 추정된다.
젊은 쿠브라트는 헤라클리우스가 사산 왕조-아바르 동맹Sasanian–Avar alliance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연합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을 수호하기 위해 헤라클리우스가 여러 스텝 민족과 동맹을 맺은 일과 맥락을 같이한다.

니케포로스Nikephoros 1세에 따르면, 쿠브라트는 635년에 “불가르족의 통치자로서 아바르족에 대한 반란에 성공하고 헤라클리우스와 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이로써 고대 대불가리아(Μεγάλη Βουλγαρία) 국가가 수립되었다.
쿠브라트는 “콘스탄티노스가 서방에 있을 때” 사망했는데, 이는 콘스탄스 2세(641~668년) 재위 기간 중 어느 시점을 의미한다.
니케포로스 1세에 따르면, 쿠브라트는 다섯 아들(바트바얀Batbayan, 코트라그Kotrag, 아스파루흐Asparukh, 쿠베르Kuber, 알체크Alcek)에게 “서로 절대 떨어지지 말라. 단결해야 그들의 힘이 번성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아들들은 성대한 장례를 치렀지만, 동쪽에서 다가오는 하자르족 압력으로 국가가 몰락하면서 곧 각자의 길로 갈라섰다.
셋째 아들 아스파루흐는 다뉴브 강으로 향하여 옛 불가리아 전통을 계승한 현대 불가리아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쿠브라트 매장 당시, 그의 시신 옆에는 각각 12개로 구성된 귀중한 금제 식기 세트 두 점이 함께 묻혔다.
쿠브라트는 이 식기 세트로 손님과 귀족들에게 대접하곤 했다.
이 세트는 순금으로 만든 잔과 와인 디캔터wine decanters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무덤에는 쿠브라트의 가장 값비싼 의복과 다양한 보석 및 장신구, 즉 팔찌, 목걸이, 버클, 허리띠 장식, 그리고 무기들이 함께 묻혔다.

개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금과 보석으로 만든 검이다.
쿠브라트는 이 검과 다른 귀중한 물건들을 그의 친구였던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610-641)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전해진다.
황제는 심지어 쿠브라트를 비잔틴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귀족 작위인 파트리키우스patrician로 임명하기도 했다.
쿠브라트는 400g이 넘는 무게의 거대한 금제 파트리키우스 버클과 이 검을 특별한 날에 착용했다.
페레셰피나 보물은 평범한 보물이 아니다.
이 문서는 불가리아 건국 초기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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